김춘수 Kim Tschoon-su
회화의 진실을 위하여
붓을 떠나 손으로 작업한 지 25년, ‘회화의 본질’에 수렴하려 하였던 가없는 질문들은 과연 얼마만큼 가능했었을까.
혹여 자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시작된 나의 그림그리기는 이후 시각에서 촉각으로, 환영에서 물성으로의 자연스러운 접근이 허용되었으며 당연히 ‘몸’을 동원하게 하였고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반복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정한 단위의 시간이란 때로는 무의미하게 여겨졌으며 작업의 ‘시간’은 오히려 멈추어버린 듯한 또는 지속선상에 있을 경우에만 가당한 어떤 무엇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생각을 옮기거나 무엇을 그린다기 보다는 물감을 묻히는 행위가 시간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와 함께 화면 위에 공존하면서 예정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지도 없는 길 떠남과 같아서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사실 그 지점에는 설레임이 더욱 크기만 하다. 그러한 두려움과 설레임들은 두 박자의 리듬을 타고 원시적인 호흡에 실려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서로 만나고 춤추고 불화하다가 다시 공명하면서 기세를 갖추며 필세를 만든다.” 그렇게, 수상한 언어 너머의 것들에 다가서려 하였다.
‘본질’은 늘 개념이나 이미지보다는 촉각과 물성을 동반할 때 실체에 가까웠으며, 삶의 본질에 관한 물음 역시 회화의 정체를 밝히려하는 무모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것과 자신을 버린다는 것 사이의 갈등이 있었으며 때로는 그 둘의 이름이 서로 다른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경험을 통과하는 동안 붓을 떠난 이유가 단지 신체의 은유를 위한 것만이 아닌 또 다른 의미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러한 조각들이 모여 나의 작업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고요에 가까운 소리를 통하여 중심에 다다르고자 하는 역설을 믿고 싶었고 단지 중력과 속도에 의존할 뿐인 소극적인 물성에 기대어 굉음을 담고자하는 열망은 신체와 정신 사이의 행간을 비집고 나온 작은 파장의 묘법으로 대신하였다. 구체적인 색상의 이름과 더불어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울트라-마린’은 회화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어떠한 제안을 제시할지 나를 설레게 한다.
회화의 진실을 통하여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끝’에는 명징한 논리의 모습을 한 회화의 구조보다는 저 푸르디푸른 깊이의 슬픔과 불가해한 그리움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6년 4월, 김춘수
붓을 떠나 손으로 작업한 지 25년, ‘회화의 본질’에 수렴하려 하였던 가없는 질문들은 과연 얼마만큼 가능했었을까.
혹여 자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시작된 나의 그림그리기는 이후 시각에서 촉각으로, 환영에서 물성으로의 자연스러운 접근이 허용되었으며 당연히 ‘몸’을 동원하게 하였고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반복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정한 단위의 시간이란 때로는 무의미하게 여겨졌으며 작업의 ‘시간’은 오히려 멈추어버린 듯한 또는 지속선상에 있을 경우에만 가당한 어떤 무엇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생각을 옮기거나 무엇을 그린다기 보다는 물감을 묻히는 행위가 시간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와 함께 화면 위에 공존하면서 예정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지도 없는 길 떠남과 같아서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사실 그 지점에는 설레임이 더욱 크기만 하다. 그러한 두려움과 설레임들은 두 박자의 리듬을 타고 원시적인 호흡에 실려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서로 만나고 춤추고 불화하다가 다시 공명하면서 기세를 갖추며 필세를 만든다.” 그렇게, 수상한 언어 너머의 것들에 다가서려 하였다.
‘본질’은 늘 개념이나 이미지보다는 촉각과 물성을 동반할 때 실체에 가까웠으며, 삶의 본질에 관한 물음 역시 회화의 정체를 밝히려하는 무모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것과 자신을 버린다는 것 사이의 갈등이 있었으며 때로는 그 둘의 이름이 서로 다른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경험을 통과하는 동안 붓을 떠난 이유가 단지 신체의 은유를 위한 것만이 아닌 또 다른 의미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러한 조각들이 모여 나의 작업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고요에 가까운 소리를 통하여 중심에 다다르고자 하는 역설을 믿고 싶었고 단지 중력과 속도에 의존할 뿐인 소극적인 물성에 기대어 굉음을 담고자하는 열망은 신체와 정신 사이의 행간을 비집고 나온 작은 파장의 묘법으로 대신하였다. 구체적인 색상의 이름과 더불어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울트라-마린’은 회화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어떠한 제안을 제시할지 나를 설레게 한다.
회화의 진실을 통하여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끝’에는 명징한 논리의 모습을 한 회화의 구조보다는 저 푸르디푸른 깊이의 슬픔과 불가해한 그리움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6년 4월, 김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