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초의 구球
- 전시기간 25.04.02 - 25.06.08
- 전시장소 호반아트리움
- 전시작가 강요배, 김보희, 김종학, 김창열, 김춘수, 이강소, 이대원, 이숙자, 이수경, 이우환, 윤형근, 장승택, 전광영, 정영주, 제여란, 채성필, Anish Kapoor, Anthony Caro, Caroline Walker, Derek Fordjour, Ding Yi, Fernando Botero, Friedrich Kunath, George Condo, Hernan Bas, Hilary Pecis, Kohei Nawa, Marc Chagall, Mat Collishaw, Mel Bochner, Nicolas Party, Rashid Johnson, Sterling Ruby, Yayoi Kusama
어제와 오늘의 기준이 급진적으로 변하는 시대에서 미적 가치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매체의 영역이 뒤섞이며 가상의 물질세계가 범람하는 동시대 미술사 안에서 곧게 나아갈 방법을 모색한다면, 고전古典으로부터의 답습과 그 이후의 퇴적물이 곧 새로운 방향으로의 단초가 되어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호반아트리움의 재개관을 기념하며 호반문화재단의 소장품 중 유의미한 미학적 서사를 담아낸 작품들을 중심으로 국내외 작가 34명을 소개한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라시드 존슨(Rashid Johnson), 앤서니 카로(Anthony Caro), 이우환, 김춘수, 조지 콘도(George Condo), 데렉 포저(Derek Fordjour), 헤르난 바스(Hernan Bas) 등 동서양을 가로지르며 미술사적 궤도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살펴본다.
전시는 현실 세계를 초월하는 심연에서 시작된다. 짙은 푸른색에서 주황색으로 번져 나가는 색감을 쫓아 오목한 거울에 거꾸로 비친 환영을 마주하면 자연스레 무수한 질문들이 떠오른다.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은 회화와 조각이 그 경계를 넘나들며 품었던 질문들은 이렇게 관람객을 반사해내며 주객을 전도한다. 본래 대상을 재현해내는 거울이라는 매체는 라시드 존슨의 검은 비누로 뒤덮이며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평면의 회화가 물질적 차원에서의 과감한 실험을 거듭하며 색감 너머의 양감을 품고 다시 회화로의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한편, 예술의 물질성 논제는 조각에서 보다 명징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기하학적으로 구조를 이루어 전시장 바닥에 선 앤서니 카로의 작품에서는 다시 물질 자체의 현존으로써 질문을 제기했던 회화의 궁극적 물음과 그 궤도를 같이한다.
오랜 미술사가 그러했듯 다시 관성처럼 회화로 돌아와 한국의 미술사를 살펴보자. 모노하 운동을 주도했던 이우환의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에는 본질에 관한 탐구라는 보편적이자 가장 원초적인 주제로서 살펴볼 수 있다. 카로의 조각이 좌대에서 내려와 관람자와 동일한 공간에서의 호흡을 의도했다면, 이우환의 ‘대화’ 작품 역시 들숨과 날숨 사이에 정성스레 그어낸 붓 자욱 하나에 관람객이 머물며 공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정된 화면 안에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람객의 시공을 예견한 한 번의 붓질이 여남은 백지에 울리며 회화의 정점에 가 닿는다. 흑백의 농담으로 정적인 명상을 이끄는 동양의 먹과 함께, 예로부터 청색의 생동이 함께 했으니, 김춘수의 울트라 마린이 우리를 붙잡아 두는 이유이다. 손자국이 중첩되어 작가의 호흡이 시간과 함께 쌓여 서구의 추상과는 다른 깊이를 자아낸다.
역사적으로 추상과 구상이 전복되며 주류를 이루었던 것처럼, 본 전시에서도 강렬한 에너지를 품은 추상작품과 함께 현대 미술사를 이끌어 온 구상작품을 나란히 감상할 수 있다. 미국의 현대적 초상화를 선도해 온 조지 콘도의 두 작품은 과장된 인물의 표정으로 유머러스하게 접근하지만 사회적 풍자를 동시에 시도한다. 또한, 20세기 이래로 주요 논제로 다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던 정체성에 관한 서사를 풀어낸 이들이 있다. 화려한 장식으로 흑인 문화를 그려낸 시대의 초상과 같은 작업을 한 데렉 포저와, 미국의 퀴어미술을 몽환적인 상징으로 담아낸 헤르난 바스가 그러하다. 이들이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인물들은 그것의 비뚤어진 모습이나 연출된 요소들로 은유한 서사를 문학적으로 표현해냈고, 우리는 그들을 통해 시대의 얼굴을 읽어낸다.
전시의 제목에서 ‘구球’는 둥근 공 형태의 것을 일컫는 말로, 아름다운 것, 우주나 창조 현상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시대를 불문하며 탄생과 소멸을 반복해왔고 그것의 궤도는 미술사 안에 작품으로 남았다. 페르소나적 이미지를 형성한 대가의 작품에서부터 실험적인 매체를 통해 예술의 확장을 모색한 작품을 하나의 전시로 엮어보며 그 궁극적인 질문에 다가선다. 본 전시를 통해 단초를 초월하는 심도 있는 미적 경험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