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영 Choi Myoung-young
'행위의 반복- 그 무미의 층위'
나는 몇 년 전 가을에 문득 '산책'이라는 말의 그 담담한 반복-회귀가 갖는 의미에 주목한바 있다. 반복되는 일상사나 비망록의 온갖 약속, 예기치 않았던 사건들은 실상 온통 점과 점 그 자체로 인식될 뿐 아니라 그 점과 점의 간극 또한 설명키 어려운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나는 그 간극을 '모호함이 가득 찬'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은 그 모호함이야말로 바로 쉼 없는 호흡과 육신의 움직임으로 충일된, 그 어떤 사물, 상념에도 묶이지 않는 바로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닐런지? 자신으로의 회귀를 가능케 하는 산책의 의미야말로 내 작업의 기본적인 정신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1970년대 중 후반 이래「평면조건」명제의 나의 작업은 한마디로 단조로움과 무미함의 연속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작업의 요체가 되는 소지, 매체, 행위는 물론이고 펑퍼짐한 작품구조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변조의 드라마나 특기할 제스츄어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캔바스에 일상적 삶 그 자체, 온갖 기억과 상념마저도 묻어가면서 그 과정의 추이에 따라 새로운 존재의 지평을 열고자 할 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평면조건'은 한마디로 회화로서의 숙명적인 평면을 그 궁극적인 상태에서 어떻게 회화화할 것인가 하는데 있으며 보다 기본적인 평면에로의 접근을 위해 몇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우선 초기 작업의 캔버스 평면 위에 질료를 전면적으로 반복 도포하는 행위를 통해 균질한 화면에서 하나의 초점 즉 중심을 허용치 않음으로써 평면을 평면 그 자체의 또 다른 존재로서 더듬어 확인하려 하는 회화관과 그 후 종이작업에서 시도한 질료의 스며듦과 배면으로 부터의 드러남에 의한 접촉감과 평면적 존재감, 80년대 중반 이후 작업에서 평면 위에 수직, 수평의 선을 반복해서 질료로 묻어가며 그 '달라져감'의 징후에 심신으로 조응하면서 덧 쌓여 이루는 비 이미지의 회화적 리얼리티에 주목하고 있다. 평면의 회화적 실존을 위한 평면화, 중심부재, 행위의 반복성, 질료의 집적과 함께 또 하나의 특징적인 결정 요인은 흔히 단색조로 지칭하는 백색 혹은 흑색조의 색조라 할 수 있는데 내가 택하고 있는 중성적인 백색조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색체 자체가 스스로 자신에게로 수렴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색채는 그 성격적인 측면 보다는 질료자체의 추이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 마치 수직, 수평으로 가득 찬 미로의 숲에서 끊임없는 수행을 반복하듯, 부단히 이어지는 소지와의 접촉, 노증되는 감정의 진폭에 따라 점진적으로 균질로 축적되어 부침하는 평면적 매스, 그 무표정하고 무미한 층위의 지평에서 나는 나의 일상, 정신구역을 통과한 하나의 세계로서의 평면구조와 마주하게 되고 그것은 화면의 물질적 시각적 틀을 넘어 그 현존을 누릴 것이다.
나는 몇 년 전 가을에 문득 '산책'이라는 말의 그 담담한 반복-회귀가 갖는 의미에 주목한바 있다. 반복되는 일상사나 비망록의 온갖 약속, 예기치 않았던 사건들은 실상 온통 점과 점 그 자체로 인식될 뿐 아니라 그 점과 점의 간극 또한 설명키 어려운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나는 그 간극을 '모호함이 가득 찬'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은 그 모호함이야말로 바로 쉼 없는 호흡과 육신의 움직임으로 충일된, 그 어떤 사물, 상념에도 묶이지 않는 바로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닐런지? 자신으로의 회귀를 가능케 하는 산책의 의미야말로 내 작업의 기본적인 정신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1970년대 중 후반 이래「평면조건」명제의 나의 작업은 한마디로 단조로움과 무미함의 연속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작업의 요체가 되는 소지, 매체, 행위는 물론이고 펑퍼짐한 작품구조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변조의 드라마나 특기할 제스츄어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캔바스에 일상적 삶 그 자체, 온갖 기억과 상념마저도 묻어가면서 그 과정의 추이에 따라 새로운 존재의 지평을 열고자 할 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평면조건'은 한마디로 회화로서의 숙명적인 평면을 그 궁극적인 상태에서 어떻게 회화화할 것인가 하는데 있으며 보다 기본적인 평면에로의 접근을 위해 몇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우선 초기 작업의 캔버스 평면 위에 질료를 전면적으로 반복 도포하는 행위를 통해 균질한 화면에서 하나의 초점 즉 중심을 허용치 않음으로써 평면을 평면 그 자체의 또 다른 존재로서 더듬어 확인하려 하는 회화관과 그 후 종이작업에서 시도한 질료의 스며듦과 배면으로 부터의 드러남에 의한 접촉감과 평면적 존재감, 80년대 중반 이후 작업에서 평면 위에 수직, 수평의 선을 반복해서 질료로 묻어가며 그 '달라져감'의 징후에 심신으로 조응하면서 덧 쌓여 이루는 비 이미지의 회화적 리얼리티에 주목하고 있다. 평면의 회화적 실존을 위한 평면화, 중심부재, 행위의 반복성, 질료의 집적과 함께 또 하나의 특징적인 결정 요인은 흔히 단색조로 지칭하는 백색 혹은 흑색조의 색조라 할 수 있는데 내가 택하고 있는 중성적인 백색조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색체 자체가 스스로 자신에게로 수렴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색채는 그 성격적인 측면 보다는 질료자체의 추이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 마치 수직, 수평으로 가득 찬 미로의 숲에서 끊임없는 수행을 반복하듯, 부단히 이어지는 소지와의 접촉, 노증되는 감정의 진폭에 따라 점진적으로 균질로 축적되어 부침하는 평면적 매스, 그 무표정하고 무미한 층위의 지평에서 나는 나의 일상, 정신구역을 통과한 하나의 세계로서의 평면구조와 마주하게 되고 그것은 화면의 물질적 시각적 틀을 넘어 그 현존을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