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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STILL LIVE – 살아 있는 시간

  • 전시기간 26.03.24 - 26.05.31
  • 전시장소 호반아트리움
  • 전시작가 백남준

백남준(1932-2006)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세상은 그가 예견했던 '전자 초고속도로'를 넘어 인공지능과 가상 현실이 일상이 된 초연결 사회로 진입했다. 우리는 이제 그를 과거의 연대기 속에 박제된 거장으로 회고하는 대신, 그의 예술이 발산하는 생명력이 여전히 현재형으로 작동하고 있음에 주목한다호반아트리움에서 개최되는 백남준: STILL LIVE 살아 있는 시간은 작가를 보존과 숭상의 대상으로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사유를 오늘날의 관객 곁으로 직접 불러내어 기술과 인간, 그리고 시간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질문을 던지는 역동적인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우리가 마주한 동시대적 풍경에서 기술과 인공지능(AI)은 인간의 사고를 확장하는 도구를 넘어, 사고의 과정 그 자체를 자동화하며 우리에게서 사유할 시간을 소거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효율과 속도라는 잣대로 재단되는 가속의 시대에, 백남준의 작업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멈춰 세운다. 그는 기술을 진보에 대한 맹목적 찬미나 비판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대신 비디오와 전자 신호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의 감각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실험했으며, 기계를 인간을 사유하게 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게 만드는 성찰적 장치로 전환했다.

이번 전시는 백남준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사유의 신호를 따라 관객이 자유롭게 유영하도록 구성되었다. 드로잉과 메모 속에 담긴 아이디어의 원형부터, 차가운 기계에 온기를 불어넣은 비디오 조각, 그리고 정적 속에서 기술의 영성을 탐구하는 명상적 공간에 이르기까지, 전시장 내의 모든 작품은 경계 없이 서로 연결되며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다.
 
전시의 도입부에서는 백남준의 전위적인 아이디어가 어떻게 치밀한 논리를 통해 실체화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그의 예술적 설계를 현실로 구현해낸 핵심 조력자 마크 팻츠폴(Mark Patsfall)의 아카이브는,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들이 정교한 '사유의 설계도'에서 출발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의 평면 작업인 드로잉과 판화 등은 비디오 작업을 위한 단순한 예비 단계를 넘어 백남준이라는 거대한 사고 체계의 발원지를 보여준다종이 위에 남겨진 획 하나, 낙서처럼 적힌 메모 한 줄에는 개념과 구조, 유머와 직관이 정교하게 교차하고 있다. 이는 전시장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 비디오 조각들의 뿌리가 되어, 전위적 예술가로서 그가 지녔던 무한한 상상력의 확장 지점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사유의 원형은 곧 기술과 영성이 조우하는 명상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와칭 붓다>, <TV 로댕>
 , <카르마> 와 같은 작품들은 차가운 기계 장치를 고요한 응시와 성찰의 공간으로 치환한다<TV 촛불> <금붕어를 위한 소나티네>가 건네는 정적 속에서 관객은 수동적인 정보의 소비자가 아닌,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로서 머물게 된다. 이는 기술이 인간의 정신을 소모시키는 현대 사회에서 백남준이 우리에게 건네는 고요하고도 강력한 처방과도 같다. 이어서 <해왕성>과 같은 대형 비디오 작품과 <나는 비트겐슈타인을 읽은 적이 없다>가 선사하는 전자적 숭고미로 확장되며, 개인의 명상을 넘어선 거대한 시대적 신호와 마주하게 한다.

사유의 파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일상과 동시대적 공명으로 나아간다. <프렌치 클락>, <네온 TV >, <버마 체스트> 등 일상의 오브제가 백남준의 언어로 재해석되는 지점에서, 기술은 더 이상 낯선 도구가 아닌 우리 삶의 양식이자 예술적 동반자로 자리한다. 특히 백남준의 정신을 오마주한 서정우의 인터랙티브 작업 <분절된 일차(一次)의 목격 실험>은 본 전시의 동시대적 호흡을 완성한다. 관객의 사운드를 실시간으로 입력받아 15대의 브라운관 속에 추상적 이미지로 변환해내는 이 작품은, 백남준이 평생을 두고 실천했던 참여 TV’비디오 신시사이저의 가치를 현대의 기술 언어로 새롭게 써 내려가며 관객을 능동적인 예술적 신호의 일부로 초대한다.

전시는 예술적 성취의 화려함을 넘어 인간 백남준의 온기를 포착하며 여정을 마무리한다. 예술적 동반자 요셉 보이스를 향한 애틋한 추모가 담긴 <보이스 복스(Beuys Vox)>, 모든 파격적인 실험의 기저에 결국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관계의 미학이 있었음을 환기한다. 그의 예술은 기술의 파도 속에서도 끝내 인간이 지켜내고자 했던 가치와 선택의 역사였음을 조용히 웅변한다.
 
백남준: STILL LIVE 살아 있는 시간은 완성된 해석이나 단일한 결론이라는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백남준이 남긴 질문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현재와 조우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 내는 열린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이 전시는 새로운 기억을 싹틔우고, 그 속에 담긴 사유의 생명력을 지속시키고자 한다. 멈춰진 화면 너머에서, 백남준의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해 여전히 흐르며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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